top of page
Thanksgiving Decoration_edited.jpg

​창문너머예술너머쇼팽

울음을 삼키듯 시작되는 발라드 1번은 혼자서 추는 춤처럼 외롭게 진행된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과정처럼 그렇게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그리는 궤도가 점점 커지다, 마침내 코다를 맞이한다. 이탈리아어로 꼬리를 뜻하는 코다는 기술적으로도, 감정적으로 과도하게 격렬하다. 코다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발라드 1번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어려운 구간이다. 여기만 참고 버텨 내면 위대한 끝인데도 말이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르락내리락 왔다 갔다 하는 손가락 사이로 감정은 끝도 없이 격앙된다. 몇 차례 정신없이 얻어맞고 나면 “와…이렇게…이렇게 끝난다고……?”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곡을 오늘의 피아니스트는 어떤 마음으로 표현할까. <창문너머예술 150-151>

 

많은 작가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서 김창열 화백은 느릿느릿한 말투로 노자의 도덕경과 달마 도사의 이야기를 꺼낸다. 사물의 핵심에 다다르면 가벼움만 남는다는 달마 도사의 말처럼 그는 한없이 가볍고 작은 물방울을 그려냈다. 그가 그리는 물방울은 모든 기억을 지워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고통과 불안을, 아픈 기억을 물방울로 지워 내며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

이런 마음을 담아 50여년을 물방울에 천착한 그의 작업은 수행에 가깝다. 그의 물방울은 매우 정교한 과정을 통해 맺힌다. 미묘한 빛의 굴절과 음영이 담긴 물방울들은 현실의 물방울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물방울이기도 하다. 그의 물방울을 보면 모든 것을 담아낸 듯하면서도 반대로 모든 것을 비워 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물방울을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비워 무의 상태로 들어가려는 그의 수행적 행위 앞에서, 우리도 어느덧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창문너머예술 147-148>

 

고속 열차에 역방향으로 앉아 멀어지는 차창 밖 풍경을 더듬어 보는 것처럼 기억을 좇아 본다. 여러 장면이 어렴풋이 스치듯 지나가다, 이내 터널 속으로 들어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터널의 끝을 바라보니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소실점 위에 하나의 장면이 있다. 창문 너머 피아노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곧 검고 큰 물체로부터 맑게 빛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홀린 듯이 한참을 서 있었다. 거실 한 편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저것으로부터 그런 소리가 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 이름을 물어봤다. “피아노란다. 너도 치고 싶니?”…

창문 너머 피아노를 훔쳐보던 나는 어느새 피아노와 함께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꿈은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미국인 화가 프레드릭 차일드 하삼의 그림은 40년전,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소녀를 소환한다.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열린 창문 옆에서 여인이, 아니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배경 때문에 계절이 여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기분 좋은 초여름의 바람이, 피아노와 탁자 위에 놓인 향기로운 꽃들이 소녀를 에워싼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소녀의 피아노 소리는 물결치듯 파장을 일으키며 실내가 일렁인다. 창밖 나무도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벽에 걸린 그림 속 첼로를 든 여인은 앙상블을 요청하듯 소녀를 바라보지만, 소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작품 제목도 즉흥곡이다. 악보도 없이 연주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하삼은 이 멋진 장면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창문너머예술 14-16>

 

우리는 매일 호흡을 하며 다양한 호흡을 만난다. 김수자의 <To Breathe>도 나의 호흡 속 어떤 구간을 채워 주웠다. 관람객을 통해 투과된 햇빛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무지개 색이 벽에, 계단에, 관람객의 몸에 투영되는 것을 경험한다. 내 몸 안 어딘가에 그 무지개 빛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만큼 자주 들렀다. 누군가는 다슬기를 닮았다고 하는데, 나는 특수 필름이 붙은 이 창문이 피아노 건반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건반을 누르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나는 것처럼 어떤 창문 앞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각도의 빛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나선형의 계단을 돌아 내려가며 창문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빛의 선율은 오묘하게 달라진다. 여느 창문이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을 담아내는 것처럼, 이 창문들은 오라같은 빛의 색을 그려낸다. <창문너머예술 203-204>

 

리움 미술관의 아트리움에서는 계단을 내려오는 관람객이 내뱉은 숨을 통해 ‘호흡’이라는 작업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피아노 건반처럼 보였던 창문은 숨구멍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숨의 흐름이 그 숨구멍을 통해 우리 눈에 보이는 색색의 빛으로 전환된다. 빛을 들이마시고 빛을 토해 내는 것, 그것이 우리의 호흡이다. 호흡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호흡하는 삶은 그래서 아름답다. <창문너머예술 205>

 

그가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집안을 구성하는 선들 때문이었다. 가로와 세로가 교차하는 창문의 선, 사각형 문, 각진 가구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려 내는 또 다른 선들은 그를 매료시켰다.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끌은>은 굉장히 심플하다. 창과 문, 벽과 바닥만 보이는 공간에 햇빛이 들어온다. 집 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막 이사 나간 뒤의 빈 집을 그렸나 생각했다. 1900년이면 하메르스회가 스트렝게제 30번지로 이사 온 지 2년이 지났을 때라 빈집은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놓이지 않는 텅 빈 공간을 그린 것은 그가 그런 공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집은 창과 문, 벽의 몰딩만으로도 그가 그리고 싶은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그의 눈에는 완벽한 공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거기에 햇빛에 먼지가 날리는 모습을 그리면, 선이 강조된 기하학적 세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약간의 반전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같은 공간에 달빛을 끌어 들였다. 달빛은 창문 바로 아래 그림자를 만들며 은은하게 번진다. 좀처럼 시간과 계절을 파악할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달빛이 내리는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창문너머예술 105-106>

© 2025 project10019.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