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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너머예술너머파리

마르크 샤갈은 창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가다. 샤갈은 자신의 방 창문을 통해 파리의 상징인 에펠 탑을 자주 그렸다. 그는 열린 창을 통해 환상적인 내면세계를 표출했는데,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초현실적인 세상을 보여 준다. “나는 창문을 열어 두기만 했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 사랑,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그녀는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로 날아다녔다.” 샤갈에게 창문은 그의 아내이자 뮤즈인 벨라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자, 그의 환상을 드러내는 또 다른 캔버스였다.  [창문 너머 예술 P 27]

 

사실 <창가의 남자>는 그의 남동생인 레노 카유보트다. 발코니 창가에서 멀찍이 한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다가온다. 정장을 입고 당당하게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저렇게 처연할 이유가 무엇일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구스타브 카유보트. 자신의 모습을 동생에게 투영이라도 한 것일까.

창가에 선 누군가의 뒷모습은 외로움이라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가 그린 창문은 소통의 창구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한발 뒤로 물러나게 만들며, 오히려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창문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만 사람들은 창안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실제로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산업 혁명 이후 급속한 도시화로 유발된 인간의 고독을 그림에 담았다.“  [창문 너머 예술 P 57, 58]

 

남자가 바라보는 창문을 경계로 바깥 풍경은 밝고 실내는 어두워 보인다. 바깥의 빛 때문에 실내가 더 어두워 보이는 것인지, 우중충한 실내 때문에 바깥이 더 밝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뭐가 되었든, 창밖의 풍경은 행복이나 희망 같은 단어를 금세 떠오르게 만든다. 그것은 죽음에서 자유로운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두운 실내는 후회나 절망처럼 죽음을 내몰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창문을 경계로 삶과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한다.

그를 구원한 것은 그림이었다. 어두운 배경 속 침잠된 실내에서 창틀이 달빛에 반사되어 십자가를 그려 낸다. 종교에 빠져 있던 아버지에게 십자가는 삶의 의미 그 자체였을 것이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그를 구원한다. 그래서 나는 이 남자가 뭉크의 아버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뭉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숨 쉬고, 고통받고, 느끼고, 사랑하는, 실제 사람들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뭉크에게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린 이 작품은 더 특별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아버지와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고 아버지를 그릴 수 있었다. 뭉크도,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아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창문 너머 예술 P65,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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